리뷰/책 리뷰

백래시(2017[1991]) - 수전 팔루디

게으른 르네 2022. 3. 12. 15:33

 

<1장 프롤로그: 그건 페미니즘 탓이야!>

- "페미니즘이 앗아간 것"이라고 주장되는 것들이 있다. '여성이 가정 안에서 행복을 누릴 권리'를 앗아갔다나? 

- "페미니즘의 실패" 혹은 "페미니즘의 끔찍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되는 것들이 있었다: 1980년대 미국 상황에서 반격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되었다고 한다.

- <남자 품귀 현상(페미니즘 탓에 결혼을 늦추려고 했던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 싶어도 남자가 모자라서 하지 못하고 있어 후회를 하고 있다는 내용)>

- <불모의 자궁(페미니즘 탓에 임신을 늦추려고 했던 여성들이 불임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후회를 하고 있다는 내용)> 

- 결론적으로는 다 헛소리로, 자신의 자유를 누리려고 하는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만들려고 하는 반격의 프레임들이다. 이 프레임을 떠들어댄 사람들은 자신이 정치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더 반격이 은밀하면서도 강했다고. 

- "하지만 그건 명백한 정치적 의도가 있어!" 우리는 그 의도를 꿰뚫어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것은 비단 페미니즘 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어떤 짓도 할 수 있을 기득권층은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기를 바란다. 그럴수록 우리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일견 탈정치적으로 보이는 다수의 주장들'에 대하여 우리는 그 주장이 전체 사회 속에서 하고 있는 역할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 반격이 여성들을 "그건 니가 과민반응하는거야"라고 말하며, 여성들을 '홀로' 고민하게 만들 때, '내가 이상한가?'하며 자신의 가정, 직장에 대한 고민을 감추게 만들 때, 반격은 그야말로 아주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고민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정치적 함의에 대해 함께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래는 두고 두고 읽기 위한 발췌

 

42쪽 

진실은 지난 10년간 여성운동이 어렵사리 쟁취한 한 줌의 작은 승리를 무력화하려는 노력, 여성의 권리에 대한 강력한 역습, 반격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역습은 대체로 은밀하다. 이 역습은 대중문화라는 허울을 쓴 히틀러식의 거짓 선동으로 뻔뻔하게 진실을 거꾸로 세우고, 여성의 지위를 고양시킨 모든 조치들이 사실은 여성의 지위하락을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43쪽 

반격은 세련되면서도 진부하고, 얼핏 보기엔 '진보적'이지만 동시에 보란듯이 후지다. 이 반격은 '과학 연구'의 '새로운' 발견들에 왕년의 싸구려 도덕주의를 버무린다. 이 반격은 영악하게 트렌드를 포착하는 대중 심리학자들의 번드르르한 선언과, 뉴라이트 설교사들의 광란의 수사들을 미디어의 입맛에 맞는 표현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반격은 여성의 권리라는 문제 전체를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마치 레이건주의가 정치담론을 극우로 전환시키고 진보주의를 악마화했듯, 이 반격은 여성해방이 이 시대 미국의 진정한 재앙이라고, 끝없는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의 원인이라고 대중들을 설득시켰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여성들이 불행해진 것은 (여성들이 아직 손에 쥐어보지 못한) '평등'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평등에 대한 여성들의 탐색을 중단시키려는, 심지어는 역전시키려는 압력이 점점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 품귀 현상'과 '불임 유행병'은 해방의 대가가 아니다. 사실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런 망상들이 바로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반격의 수단이다. 이는 가차 없이 여성들의 콧대를 깔아뭉개는 과정의 일부로서 (많은 경우 이는 노골적인 선동과 다를 바 없다) 여성들의 개인적인 근심을 휘저어 놓고 정치적 의지를 꺾는 역할을 해 왔다. 페미니즘을 여성의 적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여성의 평등을 상대로 자행되는 반격의 핵심적인 역할을 주의 깊게 보지 못하게 만들고 여성들이 자신들을 위한 대의명분을 공격하도록 부추김으로써 반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44쪽 (반격의 역사)

가장 최근의 반격은 1970년대 말, 주변이라 할 수 있는 복음주의 우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표면화되었다. 1980년대 초에 이르자 이 근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백악관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1980년대 중반, 여성의 권리에 대한 저항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용인되면서 대중문화의 일부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모든 경우에 여성들이 비약적인 성장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믿음이 확산되어 가는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47쪽

이런 현상들은 모두 연관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전체를 조종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반격은 어떤 협회가 중앙통제실 같은 데서 요원을 보내 수행하는 음모도 아니고, 그 목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심지어 이 중에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반격의 작동은 암호화, 내면화되어 있고, 분산적이고 카멜레온처럼 변덕스럽다. 반격의 모든 표현들이 동일한 무게감이나 비중을 갖지는 않는다. 어떤 것은 항상 '신선한' 시각을 은근슬쩍 구걸하는 문화 기계가 만들어낸 단순한 일회용품들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암호와 사탕발림, 이런 속삭임과 위협과 신화들은 압도적으로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인다. 

 

바로 여성들을 아버지의 딸이나 싱싱하게 푸드덕거리는 낭만적이면서 적극적인 둥지 속의 새 같은 존재, 아니면 소극적인 사랑의 대상 같은 자기들이 '용납 가능한' 역할로 다시 떠밀어 넣으려는 것이다. 

 

조직되진 않았으나 반격의 파괴력은 결코 작지 않다. 반격은 전체적인 조율의 결핍, 단일한 배후 조종자의 부재 때문에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효과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의 권리를 상대로 한 반격은 그것이 정치적인 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전혀 투쟁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성공을 거둔다. 

 

그것이 사적인 색채를 띨 때, 한 여성의 내부에 똬리를 틀고 안에서 그녀의 관점을 바꿔 버릴 때, 그래서 그녀가 억압은 모두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상상하게 될 때, 그리고 결국 그녀 역시 자발적으로 이 반격에 동참하게 될 때 반격은 가장 위력을 갖게 된다. 

 

49쪽

페미니즘은 상당히 간단한 개념이다. 

1913년 리베카 웨스트가 표현했듯 "나는 페미니즘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건, 내가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결심을 표현할 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50쪽

페미니즘의 의제는 기초적이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공적인 정의와 사적인 행복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정체성을 그 문화와 남성들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가 규정할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아직도 그렇게 선동적이라는 건 미국 여성들이 평등이라는 약속의 땅에 들어서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