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책 리뷰

나는 지진이다(마르탱 파주) - 트라우마를 가진 아이를 돕는 법에 대한 훌륭한 비유

by 게으른 르네 2022. 4. 26.

 

결혼하면서 책을 대거 중고서점에 팔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책은 그만 사자, 도서관에서 빌려 읽자, 마음 정리도 같이 한 줄 알았다. 그러나 남편이 생일선물로 갖고 싶은 것 없냐고 물었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책 뿐이었다. 

오랜만의 소유욕을 지핀 책은 마르탱 파주 컬렉션 총 세권

 

<1권: 초콜릿 케이크와의 대화>

<2권: 컬러보이>

<3권: 나는 지진이다.>

 

이렇게 각각의 독립된 세 동화로 이루어진 컬렉션이다. 2권이 절판이어서 구하는데 조금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를 읽고 마르탱 파주의 팬이 된 이후, 그의 저작들을 쭉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그것도 벌써 5~6년 전의 일이지만. 그의 여러 책들 중, 여전히 기억에 남고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이 바로 이 컬렉션에 있는 <나는 지진이다>였다.

받자마자 다시 읽어보았는데, 역시 술술 읽히고, 여전히 감탄이 나오는 작품

청소년을 위한 동화인지라(문체나 길이를 보면, 권장나이는 10세~11세 정도 아닐까 싶다) 20분 정도면 다 읽히고, 쉬운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담긴 의미를 가만히 곱씹어보면, 무언가 가슴이 먹먹해진다. 

 

 

1. 트라우마를 겪은 어린 소년인 화자

이야기의 화자는 어린 소년이다.

소년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전쟁으로 인한 폭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을 겪고,

현재 부모님에게 입양된다.

비극을 겪었지만, 소년의 말투는 명랑하면서도 위트가 있다.

 

나는 네 명의 부모님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엄마 아빠를 많이 가질 수는 없다고 한다.

왜?

엄마 아빠는 아이들을 많이 가질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엄마 아빠를 많이 가질 수 없는 거지?

(...)

어쨌든 양부모님은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다.

그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꼭 얘기해 둬야 할 것 같다.

처음에 나는 '낡은' 아이로 취급될까 봐 걱정되었다.

예전 부모님으로부터 이미 사랑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부모님은 나를 새것처럼 대해주셨다.

나는 부모님께 내 이름을 바꾸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부모님 마음에 드는 새 이름을 갖는 것이다.

이건 사랑과 관계가 있다.

나는 아직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지만, 어른이 되면,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내 이름과 옷을 바꿀 생각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중고 인간'이 되긴 싫으니까.

부모님은 이런 내 생각이 참 예쁜 생각인 데다, 그리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부모님이 사랑하는 건 지난날의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라고 하셨다.

12-13쪽

 

그런데...

2. 어느 날부터, 갑자기, 지진이 되어 버린 소년!

여기에서부터 마르탱 파주의 독특한 상상력이 피어난다.

소년은 어느날, 자신의 주변이 미세하게 흔들린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년이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일이 발생하거나 하면,

(다행히도 그런 일이 실제 발생하진 않았지만) 근처에 있던 이들이 충분히 다칠만큼의 강도로 주변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알게 된다. 학교에서는 전교생이 이러한 현상 때문에 대피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내가 지진을 일으키는 건가??

소년은 혼란스러워 한다.

 

나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요즘 말이야, 세상이 자꾸 진동하는 것 같지 않아?"라고 물었을 때,

친구들은 모두 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세상이 진동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17-18쪽

 

소년은 부모님에게 이를 말하고,

부모님은 소년을 주치의를, 주치의는 다시 지질학자를 불러, 소년이 어떤 상태인지, 이러한 주변의 떨림 현상을 멈출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게 된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내 병의 증상에 대한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지진은 언제 어디서나 찾아든다.

▶ 스트레스를 받거나, 겁에 질리거나, 화가 났을 때,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별 다른 이유 없이 지진이 발생한다.

▶ 부모님이 안아 주거나 달래 주면 지진이 조금씩 잦아들거나 멈춘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알아서 멈춘다.

26-27쪽

 

3. 소년과 지질학자의 첫 만남

주치의의 의뢰로 소년과 지질학자가 처음으로 만난 순간이 나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니시죠?"라고 묻는 소년과

"넌 바위가 아니네?"라고 답하는 지질학자.

소년은 '아이고, 주치의 선생님이 미친 여자를 만나보라고 하셨구나!'라며 당황스러워 한다.

지질학자는 지진계로 아이를 진찰해보더니

"정말이네요. 지진이 틀림없습니다!"라며 기뻐한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바라보듯 흥미로운 눈길로 소년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 둘의 만남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진을 일으키는 소년 = 주변에 해를 끼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소년, 이라고 생각을 해보면,

보통 이러한 소년의 행동은 <문제행동>으로 규정되면서,

부모이든 주변 전문가에게든, 이는 억지로라도 변화시켜야 하는 부분이지, 그 자체로서 흥미로움,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질학자는 소년=지진이라는 사실을, 다른 무엇보다도 순수한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소년도 본인이 지진이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니며,

부모도 아이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기에,

지질학자의 이러한 반응은 극중에서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를 둘러싼 실제 현실에서건 불필요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라도 그 존재 자체를 기쁘게 맞이해주는 이가 있다는 그 단순한 하나의 사실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열쇠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동화같은 소설에서 꽤나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4. "지진을 없애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요.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이죠. 지진은 자유로우니까요!"

"하지만 대책을 생각해볼 수는 있어요.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거죠.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네요"

지질학자는, 지진을 예방하는 방법,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소년과 부모를 돕기로 한다.

방법을 찾는 동안,

지진 그 자체인 소년의 존재로 인해 지진이 몇 차례 발생한다.

소년의 괴로움은 이렇게 표현된다.

 

부모님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지진은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내가 지진이 될 때마다 나를 안아주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가구를 고정시키고,

사람들한테 안전모를 나눠 주고...

부모님이 내 뒤치다꺼리를 하며 남은 인생을 다 써 버릴 것을 생각하니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지진은 내 안에서 나오지만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없다.

만약 지진이 화가 날 때나 슬플 때만 나온다면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나의 바람일 뿐.

심장과 코와 폐처럼 지진은 내 몸의 일부였다.

나는 그 길로 부모님 품으로 달려들어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날 보호해주세요!"

하지만 꾹 참았다.

내가 위험 그 자체인데 보호해 달라니? 말도 안된다.

37-38쪽

 

이 부분이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겪는 감정이 아닐까?

액팅아웃이라고 불리곤 하는, 본인의 감정적 조절의 실패로 인해, 주변인들, 특히 본인이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음을 본인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본인이 괴로울 것이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부모에게 몹시 의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밉고, 부모도 자신을 미워할 것이란 생각 때문에 쉽사리 부모에 대한 감사나 사랑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아이가 주변에 있다면,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먼저 문제와 존재 자체를 분리해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성실한 노력을 하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을, 그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아닐까 싶다.

물론... 말만 쉽지 실제 경험해보면 ㅋㅋ 이리 쉽게 말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나도 어렸을 때, 딱 이 소년만한 나이였을 때,

갑자기 분리불안 증세가 찾아와서 1년 정도 부모님 애를 먹인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맞벌이셨던지라, 어쩔 수 없는데도, 부모님 두분이 모두 내 눈에 보이기 전까지는

정말 쏟아지는 불안감(사고가 나서 부모님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불안감이었다)들 때문에 가만히 앉아있거나 일상생활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 책을 보면 그 당시의 생각들도 많이 난다.

 

부모님은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채신 듯했다.

나는 부모님께 다가가고 싶었지만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

당황해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걸 들킬까 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꼭 안아 주셨다.

"너는 지진이 아니야. 엄마 아빠 아들이야"

38쪽

 

 

5. 도시의 위험요소가 되어버린 소년

 

소년의 존재는 부모, 학교 뿐 아니라 그가 거주하는 도시 전체의 위험요소가 되고,

급기야는 소년의 사진이 온 거리에 붙는다.

이 소년은 지진이나 주의하라는 내용... ㅠㅠ

물론, 시 차원에서 소년과 그 부모에게 도시를 떠나라고 강제하거나 하는 폭력적 장면은 등장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존재가 위험인 상태인 것은 사실이고,

도대체 평화롭게 소년이 도시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그 방법을 찾기까지 소년은 괴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급기야 소년은 본인의 존재로 인해 주변에 폐를 끼치는 것에 대해서 비관하며

가출을 감행한다.

이와 같은 쪽지를 남기고!

-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 이대로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사랑해요.

 

6.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

 

소년은 처음에는 너무 괴로웠지만,

집을 나가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자연을 오롯이 경험하면서, 오히려 본인은 살고 싶음을 느끼고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소년을 찾아낸 지질학자는,

지진임을 완전히 고칠 수는 없지만,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여 주변인들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여 알려준다.

지진인 소년 주변에 인공적인 물을 설치하여

지진이 발생하려고 할 때 소년이 물에 뛰어들면 건물이 무너지는 등의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나 동화같은 해피엔딩

소년의 마지막 독백이 제일 마지막 챕터에 등장하는데,

이 부분도 매우 인상깊다.

소년이 깨달은 것을 나도 배우고자 마지막으로 인용해본다. 

나는 내가 지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건 과학적인 사실이다.

그냥 그렇게 되었고, 절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나 자신의 불행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다른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겨야 한다.

그리고 내 영혼과 정신이 이 세상을 사로잡도록,

세상 모든 것에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숲 속에서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지, 아직은 알지 못하지만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우리는 모두 지진이니까.

창밖에서 나뭇잎과 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 때문이었다.

나는 연필을 들고 벚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76-77쪽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우리는 모두 지진이니까.

어떤 면에서 모든 존재는 다 주변의 다른 존재에게 일정한 해를 가한다.

그저 circle of life가 아닐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특히나 더욱 해로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세상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으면서 살아가기!

맑은 정신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보자. 

'리뷰 > 책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드 러셀  (0) 2022.05.05
선불교의 철학(한병철)  (0) 2022.04.27
백래시(2017[1991]) - 수전 팔루디  (0) 2022.03.12